기타 | 4·19혁명에 앞장섰던 선배들이 왜 유공자되기가 어렵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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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12-14 11:17 조회5,506회 댓글0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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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혁명에 앞장섰던 선배들이 왜 유공자되기가 어렵나?
한 나라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고비는 누가 뭐라고 해도 다른 나라와의 전쟁이다. 유사 이래 전쟁은 있어 왔다. 전쟁에 패하여 영원히 없어진 나라도 많다. 나라는 없어져도 민족은 살아남는다. 민족이 살아남으면 그 나라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언어가 유지된다. 전쟁에서 패배하는 나라의 지도자는 거개 무능하거나 부정부패를 벗어나지 못하고 국민들에게 좌절과 실망을 안겨준 사람들이다.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 국리민복에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이익만 취하려다가 국가를 지탱할 힘을 잃어 망국을 자초한 것이다. 국가의 3대 요소는 주권과 국민 그리고 영토를 말한다. 이 중에 하나만 부족해도 국가로 인정받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일본에 국권을 도륙 당하고 상해임시정부를 구성하여 독립전쟁을 치른 것은 찬연한 역사 속에서 밝은 빛을 발하고 있지만 정작 ‘건국’으로 볼 수 없다는 현실적인 시비를 빗겨가지는 못하고 있음이 바로 여기에 기인한다. 그러나 그 문제를 고지식하게 학문적 틀에서만 보지 말고 민족성원 전체가 임시정부를 어떻게 보았느냐 여부로 따진다면 1919년 4월에 건국을 선포한 임시정부는 대한민국의 정통을 수립한 것이었고 광복 후 이승만정부도 이를 인정하여 1948년 8월15일을 ‘정부수립’으로 내세웠던 것 아니겠는가. 이스라엘민족은 이미 2000년 전에 나라를 잃었다. 세계 각국으로 흩어져 자신들의 언어 종교 문화를 간직해 오다가 세계2차 대전 후 예전의 땅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이스라엘을 건국했으나 팔레스타인 등 중동국가들과 처절한 전쟁을 멈추지 못한다. 이처럼 국가의 간난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나라마다 위대한 지도자와 국민이 탄생한다.
그들은 나라의 기틀이 정상화된 후에 국가유공자로 표창되며 그에 따른 보상도 지급된다. 우리나라는 1894년 인내천(人乃天)사상으로 무장한 동학농민들이 궐기하여 호시탐탐 국권탈취를 노리는 일본에 대항했으나 우금치 전투에서 일본군 신식 총에 패전한 전봉준장군의 동학혁명을 첫 손가락에 꼽는다. 1910년 강권으로 나라를 빼앗긴 이른바 한일합방 이후 의병과 독립군 그리고 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수많은 순국선열과 독립 운동가들이 두 번째에 들어간다. 세 번째는 해방이후 정권을 잡은 이승만이 12년 동안 온갖 독재와 부정을 자행하며 국민을 탄압한 만행에 저항하여 궐기한 학생들의 4.19혁명이다. 네 번째는 유신정권을 쓰러트린 김재규의 총탄을 날쌔게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의 5.18광주학살에 대항했던 민주화운동이며 다섯 번째는 군부정권을 영속시키려는 전두환의 호헌선언에 맞서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한 6월항쟁을 칭한다. 그러나 동학혁명은 이미 120년의 세월이 흘러 혁명의 주역들은 모두 사망했고 원혼의 피를 이어받은 유가족만이 외롭고 쓸쓸하게 숨어살며 전국에 산재해 있다. 일제하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분들은 아직 생존자가 있지만 유족들도 3세 4세에 이른다. 4.19혁명 주역들도 1960년 이래 벌써 60년이 가까워지고 있어 상당수가 운명했지만 생존자들도 초고령자가 되어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분들이 많다. 이번에 국가보훈처에서 4.19혁명에 참여했던 유공자에 대하여 포상신청을 접수했다. 11월16일 마감되었지만 박승춘이 보훈처장으로 있을 때 6년 5개월 이상 일체의 새로운 심사를 아예 중단했던 처지여서 상당한 숫자가 신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들의 평균 나이는 80세전후일 것이다.
이분들이 4.19유공자로 인정될 기회는 이번이 사실상 마지막이나 다름없다. 물론 사후에도 인정받을 수 있겠지만 생존해 있을 때 받게 해드리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이번 유공자심사는 2019년 3월까지 끝내고 4.19혁명 59주년이 되는 4월19일 포상할 예정이다. 보훈처는 포상신청공고에서 ‘2.28대구, 3.15마산의거 등 4.19혁명 계획수립 또는 시위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확인할 수 있는 혁명당시의 자료 및 그 밖의 자료’라는 약간 추상적인 공적(功績)자료를 요구하고 있다. 이에 앞서 국가보훈처는 독립운동공로자에 대해서 지금까지의 방침과는 별도의 상당히 누그러진 기준을 제시하여 해외등지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유족들을 배려했다. 초근목피 동가식서가숙으로 고통을 당했던 독립투사들의 고초를 크게 감안한 것이다. 당연한 조치다. 그런데 4.19유공자에 대해서는 ‘주도적 역할자료’를 내놓으라고 하니 난감하다. 부정선거 규탄데모를 하면서 나중에 유공자 되겠다고 ‘자료’를 준비한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보훈처가 더 잘 안다. 자료가 있는 사람은 사진기자의 카메라에 우연히 노출되었거나 4.19직후 신문 잡지의 인터뷰에 응했던 사람들뿐이다. 대부분 순수하고 정갈한 마음으로 부정과 독재를 규탄했다. 이들에게는 유일한 증거가 함께 데모를 했던 동료학생의 인우보증이다. 이미 유공자로 선정된 사람이 자신의 명예를 걸고 “이 사람은 나와 함께 4.19데모를 주도했던 사람이요”하고 확인한다면 이를 인정하는 것이 심사의 요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경우 인우보증의 남발이 걱정될 수도 있지만 정의를 내세운 4.19혁명유공자의 양심으로는 그럴 수 없으리라고 봐야 한다. 이들 주역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동료들이 죽어나간 청와대 앞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1인시위에 나섰겠는가. 포상심사의 기준이 폭 넓게 완화되어야 고령의 유공자들이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국가보훈처는 4.19혁명의 긍지를 지켜줄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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